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 정확히는 모릅니다.
한 번에 바뀐 게 아니었습니다. 어떤 날은 약속을 취소했고, 어떤 날은 일찍 집에 왔습니다. 그런 날들이 하나둘 쌓이면서 지금처럼 지내게 됐습니다.
처음엔 그게 손해 같았습니다. 컨디션이 괜찮은 날 일찍 끝내는 게 아까웠습니다. 더 움직일 수 있는데 그러지 않는 게 맞는 건지 싶었습니다. 루푸스가 있다고 해서 매일 조심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남들처럼 하루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이 꽤 오래 있었습니다.
루푸스 피로를 몇 번 겪고 나서는 괜찮은 날에도 조금 달라졌습니다. 오늘 괜찮다고 해서 내일도 괜찮은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지금은 그 생각이 거의 없습니다. 대신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들은 있습니다.

약속 취소 문자를 보내는 게 싫었습니다
오전에 외출하고 집에 왔는데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오후에 약속이 있었습니다. 피곤하긴 했지만 못 갈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취소 문자를 보내려다가 멈췄습니다. 이 정도면 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상대방한테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냥 나갔습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할 때쯤 이미 기운이 많이 빠져 있었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버텼습니다. 대화를 이어가면서 웃고 있었는데 속으로는 빨리 끝났으면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건 저녁이었습니다. 소파에 앉았다가 그대로 잠들었습니다. 밥은 먹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평소와 달랐습니다. 관절이 평소보다 뻑뻑했습니다. 일어나는 데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오전이 지나도록 어제랑 비슷했습니다.
그때는 왜 이런 날이 생기는지 잘 몰랐습니다. 피곤한 거랑 뭐가 다른 건지도 설명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때 느꼈던 차이는 이전 글에 적어뒀습니다.
그런 날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취소 문자를 보내지 않은 걸 후회했습니다. 보내기 싫었던 문자 하나가 다음 날 아침 두세 시간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앞서서 몸 상태를 뒤로 미루는 게 오래된 습관이었습니다. 그 습관이 바뀌는 데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직 괜찮은데 그냥 돌아온 날이 있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어느 날이었습니다.
오전에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가 생각보다 일찍 끝났습니다. 시간이 남았습니다. 근처 카페에 들어가서 쉬다가 마트도 들를까 생각했습니다. 아직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더 돌아다닐 수도 있었습니다.
근데 그냥 집에 왔습니다.
딱히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싶었습니다. 집에 와서 차 한 잔 마시고 잠깐 누워 있었습니다. 저녁에는 간단하게 밥을 먹었습니다. 별것 없는 오후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평소랑 비슷했습니다. 그날은 이상하게 그 차이가 크게 느껴졌습니다.
무리한 다음 날은 아침이 확실히 달랐습니다. 일찍 들어온 다음 날은 아침도 평소 같았습니다. 오늘 더 돌아다닐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던 게 처음으로 아깝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저녁까지 움직이면 괜찮은 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씻을 힘이 남아 있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집에 일찍 들어오는 게 아까웠습니다
처음부터 일찍 들어오는 게 편했던 건 아닙니다.
오후 네 시쯤 집에 들어오면 이상하게 하루가 덜 끝난 것 같았습니다. 아직 밖은 밝고, 시간도 남아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근처 마트에 들르거나 카페에 한 번 더 갔을 겁니다. 집에 와서도 괜히 아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한 가지를 더 하고 온 날은 저녁이 달랐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씻는 것도 귀찮아졌습니다. 밥을 차리는 일도 밀렸습니다. 아무것도 큰일은 아닌데 하나씩 버거워졌습니다.
일찍 들어온 날은 저녁이 조금 달랐습니다. 씻고 밥을 먹고, 잠깐 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좋은 하루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밤에 누웠을 때 몸이 덜 몰린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 차이를 몇 번 경험하게 되면서 일찍 들어오는 게 덜 아까워졌습니다.
괜찮은 날에도 멈추는 이유
하루가 힘든 게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무리한 날 다음 하루만 힘들었다면 그냥 지나갔을 겁니다. 근데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하루가 아니라 며칠이 달랐습니다. 아침이 무겁고 오전이 느렸습니다.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평소처럼 움직여지는 날이 며칠 계속됐습니다.
반대로 일찍 마무리한 다음 날은 아침이 평소 같았습니다. 오전부터 움직여졌습니다. 그런 날이 여러 번 지나고 나서부터는 괜찮아도 여기서 끝내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괜찮은 날에도 멈춥니다. 오늘 하루 때문이 아닙니다. 내일 아침이 어떻게 시작될지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서 뭔가 하나를 더 하면 며칠 뒤 아침이 평소 같지 않게 될 거라는 걸 여러 번 겪었습니다.
취소 문자를 보내는 게 지금도 쉽지는 않습니다. 미안한 마음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래도 보내지 않고 나갔다가 며칠을 힘들게 보내는 것보다는 낫다는 걸 압니다. 예전보다 조금 빨리 결정하게 됐을 뿐입니다.
집안일도 그날 다 하지 않습니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설거지까지 같은 날 끝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다 하고 나면 뿌듯했습니다. 그날 저녁은 아무것도 못 했지만 다 했다는 생각이 더 컸습니다. 근데 다음 날 아침은 늘 비슷했습니다.
지금은 하루에 하나 정도면 충분합니다. 청소를 했으면 빨래는 내일 합니다. 싱크대 앞에 서 있다가 그냥 돌아선 날도 있었습니다. 설거지는 다음 날 아침에 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집안일이 하루 밀린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그걸 알게 되는 데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루가 길어지는 게 싫었습니다
무리한 날은 집에 돌아온 뒤부터 더 힘들어졌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쉬면 끝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날이 많았습니다. 저녁이 길고, 다음 날 아침도 길었습니다. 일어나서 씻고 밥을 먹는 일까지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특별히 아픈 건 아닌데 하루가 자꾸 늦게 시작됐습니다.
예전에는 그걸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하루쯤 늦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그런 날이 며칠씩 계속되면 약속도 밀리고 집안일도 밀렸습니다.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괜찮아 보여도 그날 저녁까지 생각합니다. 오늘 나가서 더 움직이면 집에 와서 밥은 먹을 수 있는지, 씻고 누울 힘은 남는지 생각합니다. 거기서 이미 빠듯할 것 같으면 그냥 돌아옵니다.
예전에는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괜찮을 때 멈춘 날이 다음 날 아침을 더 편하게 만들 때가 많았습니다.
※ 이 글은 루푸스를 진단받은 환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의학적 조언이나 진단을 대체하지 않으며, 건강 관련 증상이 있다면 반드시 전문의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