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어떤 날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 몸 안에 시한폭탄이 있는 것 같다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느낌. 루푸스가 활성화될 때마다 그 생각이 떠오릅니다. 괜찮다 싶으면 또 무너지고, 무너지면 또 일어나고. 그 반복 생활이 28년이었습니다.
스무 살에 진단받았을 때는 앞이 안 보였습니다. 루푸스가 뭔지도 몰랐고, 완치가 없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냥 무서웠습니다. 이십 대를 아프고 상처받고 그렇게 보냈습니다. 대상포진이 왔고,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던 경험이 있었고, 신염이 왔고, 대퇴골 무혈성 괴사로 수술을 두 번 했습니다. 몇 년에 한 번씩 활성화되고, 입원하고, 회복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걸 반복했습니다.
지금 나이 마흔여덟입니다.
그 시간을 지나오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우울해해 봤자 내 소중한 시간만 아깝더라고요
한때는 많이 우울했습니다.
왜 나만 이런가 싶었습니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데 왜 맨날 아프다고 하냐는 말에 상처받았습니다. 가까운 사람한테 이해받지 못하는 게 병보다 더 힘들 때도 있었습니다.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얼굴이 변하고 체중이 늘었을 때는 거울을 보기 싫었습니다. 한창 예뻐야 할 이십 대 초반이었으니까요.
그 감정들이 다 진짜였습니다. 억울했고, 슬펐고, 외로웠습니다.
근데 어느 순간 알게 됐습니다. 우울해하고 속상해봤자 루푸스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 시간 동안 내 소중한 하루가 그냥 지나간다는 것. 아프면 약 먹고 병원 가면 되지. 그 생각이 자리를 잡기까지 꽤 오래 걸렸습니다. 저절로 된 게 아니었습니다. 반복을 겪고, 겪고, 또 겪으면서 조금씩 단단해진 거였습니다.
지금은 활성기가 와도 예전처럼 무너지지 않습니다. 신호가 오면 바로 움직이고, 치료받고, 회복하면 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루푸스와 살면서 생긴 생활 기준들은 루푸스와 살면서 생긴 나만의 기준들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나쁜 일에 에너지를 쓰지 않게 됐습니다
루푸스가 가르쳐준 것 중 하나입니다.
내 몸의 에너지가 한정돼 있다는 걸 압니다. 루푸스가 있는 몸은 다른 사람들보다 에너지가 빨리 방전됩니다. 그러니까 어디에 쓸지가 중요합니다.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한테 설명하는 데 에너지를 쓰는 게 아깝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상처받는 데 에너지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엔 내 병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이해받고 싶었으니까요. 근데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의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해하려는 사람은 조금만 말해도 알아줬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설명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은 굳이 다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프다는 말을 쉽게 하지 않게 됐습니다. 그게 처음엔 상처였는데, 지금은 그냥 내 방식이 됐습니다. 에너지를 아끼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루푸스가 있는 몸은 쓸 수 있는 에너지가 한정돼 있습니다. 그걸 어디에 쓸지 고르는 것도 관리의 일부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루푸스를 친구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평생 함께 가야 하는 거라면, 적으로 두는 것보다 친구로 두는 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관리해줘야 하는 존재. 신경 써줘야 하는 존재. 가끔 많이 힘들게 하는 존재. 근데 없애버릴 수 없는 존재.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 생각이 처음부터 됐던 건 아닙니다. 루푸스가 생기고 한참 동안은 이 병이 원망스럽고 싫었습니다. 왜 하필 나한테 왔냐고. 근데 원망한다고 달라지는 게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지쳤습니다. 받아들이고 나서야 조금 편해졌습니다.
루푸스가 있어서 잃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루푸스가 있어서 생긴 것들도 있습니다. 내 몸 신호를 읽는 감각, 에너지를 아끼는 방법, 불필요한 것에 힘 빼지 않는 것. 아프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것들입니다. 물론 안 아팠으면 더 좋았을 겁니다. 근데 이미 함께 온 거니까, 잘 데리고 살기로 했습니다.

같은 상황의 누군가에게
루푸스를 진단받고 막막한 분들한테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처음엔 다 모릅니다. 저도 몰랐습니다. 약을 먹으면 다 나을 줄 알았고, 재발하면 무너졌고, 합병증이 올 때마다 왜 또 이러나 싶었습니다. 그게 당연한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알게 됩니다. 내 몸이 느끼는 이상한 신호가 뭔지, 언제 병원에 가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덜 힘든지. 그게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습니다. 겪으면서 쌓이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만큼은 꼭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가장 소중합니다. 남들이 이해 못 해도,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매일 어딘가가 불편하고 무거운 걸 나는 압니다. 아무도 몰라줘도, 당신이 버텨온 시간은 진짜입니다.
반복을 겪고 나서 바뀐 것들
| 항목 | 바뀐 것 |
| 재발에 대한 태도 | 무너지던 것 → 신호 오면 바로 대응 |
| 주변 시선 | 상처받던 것 → 에너지 아끼는 방향으로 |
| 루푸스를 대하는 방식 | 원망 → 함께 가야 할 친구 |
| 감정 소비 | 우울, 자책 → 내 소중한 시간 지키기 |
| 지금의 기준 | 아프면 약 먹고 병원 가면 된다 |
마무리
28년입니다.
스무 살에 시작해서 마흔여덟이 됐습니다. 그 사이에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팠고, 무너졌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루푸스는 아직 완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의학은 계속 발전하고 있습니다. 신약 개발도 이어지고 있고, 임상시험 중인 치료제들도 있습니다. 루푸스를 처음 진단받던 28년 전과 지금은 치료 환경 자체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때는 없던 약들이 생겼고, 관리할 수 있는 방법도 늘었습니다.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나은 치료법이 나올 거라고 믿습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살아가려고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약을 챙기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지만, 저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 기록을 읽는 분들 중 같은 상황에 있는 분이 있다면, 처음의 막막함이 조금 덜했으면 합니다.
※ 이 글은 루푸스를 진단받은 환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의학적 조언이나 진단을 대체하지 않으며, 건강 관련 증상이 있다면 반드시 전문의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