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해기가 길어지면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루푸스가 있다는 걸 잊기 시작합니다.
약은 먹습니다. 병원도 다닙니다. 근데 아프지 않으니까 실감이 없어집니다. 아침이 가볍고, 관절도 별로 안 뻣뻣하고, 외출해도 크게 방전되지 않는 날들이 이어집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합니다. 이제 좀 괜찮아진 건가. 이 정도면 남들이랑 비슷하게 살 수 있는 건가.
그 생각이 드는 순간이 사실 제일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명절에 바닥에 앉았습니다
대퇴골 무혈성 괴사 진단을 받기 전, 루푸스가 꽤 오래 조용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명절에 온 가족이 바닥에 둘러앉아 있었습니다. 저도 그냥 앉았습니다. 별생각 없이. 예전 같으면 의자를 가져왔을 텐데, 그날은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저녁부터 사타구니 쪽이 묵직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계단을 오르는데 오른쪽이 달랐습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뭔가 걸리는 느낌. 그날은 오래 앉아있어서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날은 오래 앉아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지나친 첫 신호였던 것 같습니다. 루푸스가 조용할수록 내 몸에 이상반응을 더 쉽게 지나쳐버리게 됩니다. 아프지 않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넘기다 보면 쌓입니다. 명절 바닥이 그랬습니다.
그때는 통증이 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더 쉽게 넘겼습니다. 아프면 멈췄을 텐데, 애매하게 괜찮으니까 계속 평소처럼 움직였습니다. 돌아보면 몸이 보내는 신호는 대부분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견딜 수 없는 통증보다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 그걸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순간들이 더 많았습니다.
취소 버튼을 누르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관해기 때 생기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일정을 늘립니다. 평소엔 잘 안 잡던 약속도 잡습니다. 오전에 외출하고 오후에 또 나가는 날도 생깁니다. 그날그날은 버텨집니다. 피곤하긴 한데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계속 스케줄을 잡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나면 다음 주 아침이 달라져 있습니다. 관절이 묵직하고, 피로가 쌓인 채로 하루가 시작됩니다. 그때 가서야 지난주를 돌아봅니다.
취소 문자를 보내는 게 미안해서,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서 버텼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 판단이 맞은 날보다 틀린 날이 더 많았습니다. 상대방한테 미안한 마음이 앞서서 내 몸 상태를 뒤로 밀어두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취소 버튼 하나 누르는 게 그렇게 오래 걸렸습니다. 지금은 그 시간이 짧아졌습니다. 그것만 해도 꽤 달라진 겁니다.
예전에는 약속을 지키는 게 몸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한 번 미루면 계속 미루게 될까 봐, 너무 예민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그냥 나가는 날도 있었습니다. 근데 지나고 보니 하루 무리해서 얻는 건 별로 없었습니다. 오히려 며칠을 쉬게 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햇빛 좋은 날 너무 오래 걸었습니다
봄이었습니다.
한강에 나갔습니다. 날씨가 너무 좋았습니다. 기분도 좋았습니다. 평소보다 훨씬 오래 걸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다리가 좀 무거운 것 같았는데 많이 걸어서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집에 와서 소파에 앉았다가 저녁까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밥을 차려줬습니다. 싱크대 앞에 섰다가 그냥 돌아섰습니다. 설거지는 다음 날 아침에 했습니다.
햇빛 좋은 날이 제 몸에는 좋은 날이 아닐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날은 그 생각이 늦게 들었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판단이 느슨해집니다. 날씨가 좋으면 더 그렇습니다. 루푸스가 조용한 시기에 날씨까지 좋으면, 그날만큼은 아무 문제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 기분이 틀릴 때가 있습니다.
착각이 오는 타이밍
돌아보면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아플 때는 알아서 조심하게 됩니다. 괜찮을 때 방어가 느슨해집니다. 저는 관해기가 길어지면 조금씩 방심하게 됐습니다. 아프지 않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조심하던 기준도 느슨해졌습니다.
그 시기에 바닥에 앉고, 일정을 늘리고, 햇빛 아래 오래 있게 됩니다.
몰라서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알면서 괜찮을 것 같아서 했습니다. 그 차이가 있습니다. 루푸스를 모르던 시절에 한 실수가 아니라, 28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하는 실수입니다. 알고 있어도 방심은 옵니다. 그게 관해기의 특성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관해기가 길어질수록 오히려 조금 더 조심하려고 합니다. 예전엔 괜찮아졌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는데, 지금은 조절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처럼 무조건 줄이지는 않습니다. 대신 조금 덜 욕심내고, 하루 정도 여유를 남겨두려고 합니다.
착각했던 날들
돌아보면 비슷한 패턴이 반복됐습니다.
① 명절 바닥에 오래 앉음
→ 이 정도는 괜찮겠지
→ 다음 날부터 사타구니 통증 시작② 일정 연달아 잡음
→ 버텨지니까 됐겠지
→ 다음 주 아침 컨디션 급락③ 햇빛 좋은 날 장시간 외출
→ 기분 좋으니까 조금 더
→ 당일 저녁 완전히 지침④ 관해기가 길어짐
→ 이제 좀 나아진 건가
→ 방심 후 무리하게 됨
돌아보면 문제는 몰라서가 아니라 괜찮다고 생각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틀립니다
완벽하게 조절되지는 않습니다.
괜찮다는 느낌이 올 때 한 번 더 생각합니다. 정말 괜찮은 건지, 아니면 오늘만 괜찮은 건지. 그 둘이 같지 않다는 걸 압니다. 근데 그걸 알면서도 가끔 틀립니다.
그날 저녁 설거지를 다음 날 하게 되는 날이 아직도 있습니다.
※ 이 글은 루푸스를 진단받은 환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의학적 조언이나 진단을 대체하지 않으며, 건강 관련 증상이 있다면 반드시 전문의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