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달력부터 봤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 괜찮아? 다음 주 점심 어때?
날짜가 비어 있으면 약속을 잡았습니다. 비어 있다는 게 곧 갈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지금은 조금 다릅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약속 날짜를 보기 전에 먼저 확인하는 것들이 생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을 만나는 방식도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왜 약속 시간을 오전이나 점심으로 잡게 됐을까?
저녁 약속이 힘들어진 건 어느 순간부터였습니다.
저녁 약속은 보통 여섯 시나 일곱 시에 시작합니다. 거기서 두세 시간 있다가 집에 오면 열 시가 넘습니다. 씻고 나면 자정 가까이 됩니다.
딱 하루만 그러면 괜찮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늦게 귀가한 다음 날은 아침부터 몸이 무거웠습니다. 전날 몇 시간 이야기하고 웃었던 것뿐인데 하루 전체가 느려지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점심이나 오전 약속을 더 편하게 생각합니다.
오전 약속은 일찍 나가야 하지만 집에 오는 시간도 이릅니다. 오후가 남습니다. 피곤하면 낮잠도 잘 수 있습니다.
같은 사람을 만나도 저녁이냐 점심이냐에 따라 다음 날이 달랐습니다.
왜 이동 시간이 중요해졌을까?
약속 장소까지 얼마나 걸리는지를 전보다 신경 쓰게 됐습니다.
한 시간 거리면 왕복 두 시간입니다. 환승이 있으면 더 걸립니다. 날씨가 안 좋은 날은 더 힘들어집니다.
어느 날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는데 친구는 이제 막 도착해서 커피를 주문하고 있었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물부터 마셨습니다.
약속은 이제 시작인데 이미 집에 가서 쉬고 싶었던 날도 있었습니다.
그 뒤부터는 약속 자리보다 오가는 길을 먼저 체크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장이나 야외 행사, 넓은 공원처럼 많이 걷게 되는 장소도 한 번 더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동 거리가 짧아도 많이 걸으면 체력이 생각보다 빨리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게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건가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번 겪고 나니까 미리 확인하는 게 낫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전에는 약속 장소가 멀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평소 가보지 않던 동네에 가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약속이 끝난 뒤 근처 카페를 들르거나 잠깐 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체력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약속이 시작되는 시간이 하루의 시작이었다면, 지금은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이미 약속이 시작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왜 연속으로 약속을 잡지 않게 됐을까?
금요일 저녁에 약속이 있고 토요일에 또 약속이 있으면 예전에는 그냥 잡았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틀 연속으로 나가면 두 번째 날이 확실히 힘듭니다.
토요일 약속 장소에 도착했는데 몸은 아직 금요일 저녁에 두고 온 것 같은 날도 있었습니다.
친구들 이야기에 웃고는 있었는데 속으로는 몇 시쯤 집에 갈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던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 날은 집에 오자마자 누웠습니다.
금요일에 나갔으면 토요일은 집에 있어야 일요일이 그나마 괜찮았습니다.
달력을 볼 때 이제는 이틀이 붙어 있는지 아닌지도 같이 보게 됐습니다.
왜 갑자기 약속을 취소하는 날이 생겼을까?
예전에는 몸이 안 좋아도 나갔습니다.
오래전에 잡은 약속이면 취소하기가 더 어려웠습니다.
그냥 가면 괜찮아질 것 같았고, 취소하면 미안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나간 날 다음 날은 어김없이 힘들었습니다.
나가지 말았어야 했나 싶은 날이 몇 번 반복됐습니다.
그러면서 조금 달라졌습니다.
약속 취소 문자를 보내고 한참 핸드폰만 보고 있었던 날도 있었습니다.
괜히 미안했습니다.
답장이 늦어질수록 더 그랬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답장은 대부분 비슷했습니다.
괜찮아.
몸 괜찮아지면 다음에 보자.
그 말을 몇 번 듣고 나서야 혼자 미리 걱정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더 길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왜 이제는 먼저 이야기하게 됐을까?
약속을 잡을 때 먼저 말하게 됐습니다.
오늘은 이동이 조금 힘들 것 같다고, 가까운 곳이면 좋겠다고, 시간을 조금 당길 수 있냐고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이런 말을 꺼내는 게 불편했습니다.
괜히 예민하게 보일까 봐 망설였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괜찮다고 했습니다.
장소를 바꾸자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시간을 바꾸자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혼자 고민하던 시간보다 말하고 나서 마음이 편했던 날이 더 많았습니다.
괜찮다고 먼저 말하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루푸스 환자인 걸 숨기고 괜찮은 척했던 날들이라는 글에 적어두었습니다.
지금 약속을 잡기 전에 먼저 확인하는 것들
- 최근 며칠 동안 피로가 쌓이지 않았는지
- 병원 일정이나 검사 날짜와 겹치지 않는지
- 약속 다음 날 쉴 수 있는지
- 이동 거리가 너무 길지 않은지
- 오래 걷는 일정은 아닌지
- 이틀 연속 외출이 되는 건 아닌지
- 약속 시간을 오전이나 점심으로 조정할 수 있는지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겠지만 저한테는 몇 가지 나름의 원칙이 생겼습니다.
- 주말 약속은 가능하면 토요일 점심으로 잡기
-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장에서 너무 멀지 않은 장소 고르기
- 약속 다음 날 일정이 있으면 저녁 약속은 피하기
- 이동 시간이 긴 약속은 하루에 하나만 잡기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했던 건 아닙니다. 몇 번 무리하고 나서야 저한테 맞는 기준들이 하나씩 생겼습니다.
이걸 매번 꼼꼼하게 따지는 건 아닙니다.
그냥 머릿속으로 한 번 훑는 정도입니다.
그 한 번이 생기고 나서 약속 이후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이런 걸 미리 생각하는 게 너무 까다로운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친구를 만나는 일인데 왜 이렇게 따져야 하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몇 번 겪고 나니 알게 됐습니다.
무리해서 나간 날은 약속이 끝난 뒤 며칠이 힘들었고, 조금 덜 무리한 날은 다음 날 평소처럼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약속을 줄이기 위해 확인하는 게 아닙니다.
약속이 끝난 다음 날까지 괜찮기 위해 확인하는 것들에 더 가깝습니다.
만나는 횟수는 줄었을지 모릅니다.
대신 만나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약속을 지키는 게 먼저였습니다.
지금은 약속 이후의 하루도 함께 생각합니다.
친구를 덜 좋아하게 된 것도 아니었고, 약속이 싫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전에는 약속을 다녀오고 나면 며칠 동안 집에서 쉬어야 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예전보다 덜 무리하고, 조금 더 오래 만나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렇게 바뀌고 나서 친구를 만나는 일이 전보다 덜 부담스러워졌습니다.
만나는 횟수보다 다음에도 또 만날 수 있는 방식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 이 글은 루푸스를 진단받은 환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의학적 조언이나 진단을 대체하지 않으며, 건강 관련 증상이 있다면 반드시 전문의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